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페르디난드 마젤란 (문단 편집) === 세계 일주 항해 === 마젤란 함대의 세계 일주 항해는 험난했는데 '''수많은 역경을 돌파하며 이뤄낸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이름 높다. 1519년, 5척의 배와 270명의 선원으로 스페인을 출발한 마젤란의 함대는 [[라플라타 강]](지금의 [[우루과이]])까지는 수월하게 도착했지만 루이 팔레이로의 계산에 따르면 라플라타 강이 바로 [[마젤란 해협]]이었어야 했다.[* 루이 팔레이로는 남위 40도 부근에 마젤란 해협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마젤란 해협은 훨씬 남쪽에 있다. 대략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쯤의 위도가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 이라고 계산한 것.] 여기서부터 최초로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두 달 가까이 폭풍에 시달려 항해가 어려웠고 마젤란 특유의 모난 성격 때문에 다른 함장들의 자율권을 박탈하다시피 하며 위압적으로 대하는 데다 모든 정보를 틀어쥐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함대의 다른 함장들과 갈등과 충돌이 일어났다. 거기다 마젤란은 [[포르투갈인]]이었지만 함장들과 선원들이 전부 [[스페인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외국인]] 주제에 너무한다며 반감까지 발생해 이 갈등은 더욱 증폭된다. 특히 왕의 측근으로 마젤란을 감시하기 위해 원정에 동행한 [[후안 데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의 독선적인 처사에 화가 나 노골적으로 마젤란의 명령에 불복했다. 그러자 분노한 마젤란은 카르타헤나를 체포했다가 다른 선장들의 만류로 풀어주었는데, 이는 머지 않아 더 큰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결국 1520년 겨울이 되도록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지 못하자 선원들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최초의 반란은 아니었고 후안 데 카르타헤나가 이전에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공동 사령관에서 박탈당했다.] 그 수가 총 5척 중 3척이나 되었다. 마젤란은 휘하 선원들을 지휘하여 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주동자들을 처형하게 된다. 반란을 일으킨 4인의 스페인인 선장들 중 빅토리아호의 멘도사는 마젤란의 부하들이 협상하는 척하면서 숨겨둔 칼로 죽였고, 케사다는 붙잡은 다음 사지를 찢어서 끔살, 카르타헤나와 신부(사제)였던 페드로 산체스 데 라 레이나는 해변에 버려졌고 엘카노만이 용서받았다. 가담한 선원 40명도 일손 부족으로 용서해주었다. 남아메리카 연안에서 겨울을 지낸 뒤 이듬해 봄 마젤란은 결국 마젤란 해협[* 마젤란은 발견할 당시에 빅토리아 호를 따서 빅토리아 해협이라 불렀다.]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위대한 발견이었지만, 마젤란 해협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산티아고 호가 난파되고, 메스키타가 지휘한 산 안토니오 호[* 마젤란 선단에서 가장 큰 배였다. 한때 선단에서 풍랑으로 이탈했던 산 안토니오 호의 선장 메스키타는 본 선단을 찾아서 합류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항해장이었던 에스테반 고메스와 선원들은 남은 식량이 3개월분뿐이며 더 이상의 항해는 무리라는 것을 들어서 스페인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돌아가고 만다.]는 결국 함수를 돌려 함대에서 탈주하고 만다.[* 산 안토니오 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원정이 실패했다고 단언하며 모든 책임을 마젤란에게 덮어씌웠다. 덕분에 스페인에 남아 있던 마젤란의 가족은 당국의 탄압을 받았으며, 이런 오해는 마젤란의 사후까지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두 척의 배를 잃은 상태에서 나머지 세 척은 마젤란 해협을 돌파[* 산 안토니오 호의 합류를 기다리면서 척후를 파견하다가 해협의 돌파사실을 알게 된다.], [[태평양]]에 진입한다. 마젤란 해협의 혹독한 기후와 정반대되는 고요한 태평양의 광경을 본 마젤란은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의 'Mare Pacific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후의 항해는 그야말로 '[[굶주림]]'[* 이건 냉정하게 평가해서 일정 정도는 마젤란의 자업자득+외부적 상황의 결합에 의한 것이었다. 마젤란은 원래 엄청난 양의 식량과 무기, 교역품을 싣고 항해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포르투갈의 방해와 여타한 문제로 항해 준비에만 8개월 이상을 소모했지만 보급을 다 끝내지 못했고 식량은 착오로 인하여 절반도 싣지 못했다. 산 안토니오호의 회항이 선원들의 동조를 얻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원정대에서 식량이 많이 실렸던 산 안토니오 호의 이탈은 원정대가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원인을 제공했다.]과 '[[괴혈병]]'과의 사투. [[세계지도]]의 태평양 부분을 보면 그래도 수백 개의 섬들이 존재하고, [[마오리족]]같은 비교적 발달한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섬도 상당했지만 '''참으로 운이 없게도 이들이 지나간 항로에 [[섬]]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나 상황이 참담했는지 피가페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가루가 다 된 오래된 비스킷밖에 먹을 게 없었다. 벌레가 득실거리고 쥐가 음식을 먹고 그 위에 싸놓은 오줌 냄새가 지독했다. 한 조각에 은화 반 냥이 거래되는 쥐도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었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이런 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남아 있는 물과 식량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태평양 횡단 막바지에 이르자, 매우 부실한 상황이었고 그 마저도 서서히 동이나고 있었다. 물은 그나마 빗물을 받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탄수화물]]에만 치우쳐진 식량은 그렇지 않았다. 무인도라도 나와야 물과 식량을 보급받을 텐데 그런 것조차 없으니, 심리적으로 매우 압박된 상황이었다. 태평양 횡단 막바지엔 마스트를 묶은 쇠가죽도 뜯어먹으며 단백질을 보충하는 등 그야말로 [[막장]]이었다고 한다. [[유령선|그나마 폭풍이라도 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몰살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굉장히 운 좋게 가까스로 [[괌]] 섬에 상륙해 물과 식량을 보급받았는데, 순순히 말을 들은 이유 중 하나가 이들이 섬을 발견하고 배에서 축포를 쐈더니 놀란 원주민들이 죄다 해안으로 뛰쳐나와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배에 승선해 있던 원주민 선원 중 한 명은 이들과 말이 통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서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아시아 끝으로 왔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여담으로 이들의 배를 처음 본 차모로 원주민들이 보트를 훔쳐가 버리는 바람에 원주민들과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참고로 '괌'이란 이름도 원주민인 차모로족 추장이 '''"우리 [[부족]] 중 도둑놈이란 없다!"''' 라고 ~~발뺌~~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차모로어]]로 '없다'라는 뜻의 단어가 'Guaham' 이기 때문. 이 때문에 괌 섬은 한동안 스페인어로 "도둑 섬"이라고 불렸다. 괌 섬을 거쳐 필리핀 [[민다나오 섬]] 동부에 위치한 불교 계통의 [[부투안 왕국]](Butuan)에 닿게 되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물과 식량을 얻을 수 있었고, 부투안은 가진 영토에 비해서 매우 부유한 편이었고 또한 이곳의 왕은 새로온 스페인 이방인들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일반 백성들의 집과 생필품도 각종 [[금]]과 [[비취]] 등 귀금속 공예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부투안은 무역로를 [[크메르]], [[중동]], [[인도]], [[중국]]및 [[일본]], [[참파]]까지 광범위한 국제 무역로를 형성해 필리핀 제도 내에서 마닐라 왕국과 함께 금,은뿐만 아니라 각종 귀금속을 가장 많이 보유한 부유한 왕국이었다. 마젤란은 쉽게 이들과 친선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곳은 몇 십년 후에 스페인군이 필리핀 곳곳의 토착 왕국들을 회유, 정복을 하며 [[필리핀 도독령]]으로 흡수할 때 초창기부터 [[로마 가톨릭]]으로 쉽게 개종하며 스페인을 지지한다. 이후 몇백 년간 이어지는 [[갈레온]] 무역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